카테고리 없음

여행을 마치고 2020.01.23

다섯시의남자 2020. 1. 23. 13:27

여행을 마치고

 

따뜻한 유자차나 마셔야겠다고 생각하고 커피포트에 물을 넣으면서 선반 위에 있는 컵을 보았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차를 마시던 컵이다. 멋진 청동으로 만들어졌고 러시아 국영 철도 마크가 중간에 찍혀 있어 얼핏 보면 트로피와도 닮았다.

선반 위에 저렇게 세워두니 진짜 트로피처럼 보인다. 누구라도 사무실에 들어오면 안 보려야 안 볼 수 없는 위치에 자랑스럽게 올려 뒀다. 애초에 컵의 용도로는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저 컵을 보고 사람들이 이건 뭡니까?’라고 물어 주기를 고대하면서(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대한 얘기를 실감 나게, 장황하게 설명할 준비가 되어있다 듣는 사람 입장은 생각도 않고...), 또 가끔 쳐다보면서 스스로 뿌듯해지는 용도로 구매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행을 마친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까마득한 추억으로 느껴진다. 이번 여행은 한 가지 주제가 아니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여행 중의 또 다른 여행이라고 해야 할까? 블라디보스토크나 이르쿠츠크는 한 나라이긴 하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도시이다. 시차가 두 시간이나 나고, 열차로 34일을 줄곧 가서야 만나게 되는 도시다 보니 문화도 어쩐지 다르게 다가온다. 거기다가 바이칼호수의 엄청난 장관이 중간에 더해지니 내가 어디를 여행한 거지?‘ 하는 질문이 생긴다. 한 여행에서 여러 경험과 감동이 섞여 있는 탓에 정리하지 않으면 분명 희석되기 딱 좋은 상황이 될 거 같다.

이래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는구나... 절감한다.

 

그래. 기록을 해야 한다. 그것도 구체적이면서 즉각적으로. 펜과 노트만 있다고 될 게 아니라 여유가 있어야 한다. 짐도 최소로 줄이고 일정도 심플하게 짜고 혹시 달라질 여정에 대한 대안을 생각해 더 여유롭게 가져가자.

캐리어를 끌게 되면 한 손이 늘 묶여 있으니 배낭을 메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마실 물을 배낭 옆에 꽂아 두기도 편하고 카메라나 휴대폰 보관도 용이하다. 한 손에 혹시 여권을 들어야 하더라도 다른 손이 남고 급할 때 뛰기도 좋다. 무엇보다 캐리어에 비해서 훨씬 있어 보인다(간지난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기록이 용이하다.

 

또한 관찰이 중요하구나실감했다. 사소한 사건 하나로 몇 페이지를 쓸 수도 있지만 잘 관찰하지 않으면 전혀 쓸거리가 아니게 된다. 여행 작가 빌 브라이슨은 세탁 건조한 옷에서 나오는 보풀 하나로도 깔깔 웃게 만드는 글을 쓴다는데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마어마한 것을 보고도 사진 한 장만 못 한 감동만 전하고 있으니 스스로 초라한 느낌이다. 관찰은 미세한 것들도 하나의 세계로 만들어 내는 창조에 가깝다. 그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

 

나도 기록 디자이너이다. 교육과정을 마쳤으니 당연하다. 면허가 있다고 운전이 다 능숙한 건 아니지만 차츰 능숙해 질 거라고 예상한다. , 운전을 계속 했을 때에 한해서 말이다. 장롱 속에서는 면허증 스스로는 아무런 경험을 쌓지 않는다. 기록을 디자인하려면 우선 기록을 해야 하는데 이번 여행을 통해서 내가 전혀 기록에 익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행작가가 꿈은 아니지만 여행을 좋아하니 당연히 여행 이야기가 많을 수 있는데 결과는 그렇지가 못했다. 몇 개 건진 것도 다분히 감성적인 접근이었지 사실적인 기록을 기반 하지 못하니 글에 한계가 있다. 양도 적을뿐더러 중복 된다. 벽을 만난 기분이다.

 

기록하고 관찰하고 즉각적으로 정리하고,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이 습관이 되었을 때 내 삶은 더 깊어지고 넓어지리라 기대한다. 이제 초보운전을 달고 직진 밖에 안 되지만 열심히 직진이라도 하다 보면 어느 날에는 주위 풍광을 둘러 볼만한 여유까지 생기지 않겠는가. 그렇게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