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내린 비 때문인지 거리가 깨끗해진 느낌이다.
숙소에서 내려와 오른쪽에 보이는 세븐일레븐에서 우유가 들어간 달달한 크림커피와 물 하나를 계산하고 테이블에 앉았다.
필리핀도 편의점에서 간단히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이 많은가보다. 이른 시간인데도 혼자 바삐 아침을 해결하는 모습이 여럿 보인다.
어젯밤 12시가 넘어 도착했다. 공항에 마중 나온 친구 집으로 갔더니 소고기국밥을 내 왔다. 예상하기로는 망고주스와 반딧살(필리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빵으로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모닝 빵 같은 것인데 중독성이 있어 자꾸 생각난다) 정도가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친구는 마닐라에서 산 지가 8년이 돼간다. 그전에는 상해에서 8년을 살았다. 막내딸이 상해에서 태어나서 ‘연’자 돌림을 사용해서 이름을 ‘해연’이라 지었다. 한국에서 살아 본 적이 없어 정체성이 조금 혼란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여러 가지 얘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누었다.
외국생활을 오래 하면 아무래도 고향이 그리울 것이다. 늘 만나는 교민들이야 딱 정해진 사람들 일 테니 이렇게 오랜만에 그것도 친한 친구를 만나니 얼굴에 웃음이 가시질 않는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났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두 시간이나 기다려야겠지만 침대에 누워 있느니 근처에 차 마실 곳을 찾아서 책이라도 읽을 요량으로 나왔다.
원래는 아침 산책을 하고 싶었는데 보기에는 멋진 풍경이지만 실제로 나가보니 습하다. 산책 후에 수영장에라도 간다면 모르겠지만 가방까지 들고 산책을 하기에는 번거롭다.
게이트를 지키는 가드들은 자기들끼리 늘 재밌나 보다. 지나다 보면 언제나 총을 들고 노닥거리는 것이 예비군훈련장 같다는 생각이 든다. 빌리지나 건물을 지키는 경비이긴 하지만 무장을 하고 있어 여기가 필리핀임을 자각게 한다. 약간은 긴장하게 된다.
알라방에 있는 Palms county club에서 아침 식사를 겸해서 짧은 미팅을 가졌다. 멋진 수영장과 실내 스포츠시설이 잘 갖춰진 데다 훌륭한 레스토랑이 있다. 빵도 맛있고, 치즈나 소시지, 커피, 모든 게 다 깔끔하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인데 이만큼 훌륭한 시설이 없다. 근처에 살고 싶어진다.
아내와 가끔 은퇴 후의 계획에 관해서 얘기를 나누는데, 조금 이른 은퇴를 하고 동남아 어딘가에서 10년 정도는 살아 볼까 싶다. 나는 마닐라나 따가이따이 정도면 좋다고 생각하는데, 아내는 태국이나 베트남을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고 따로 살 건 아니니깐 잘 상의를 해야겠지만...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할 정도의 수입원에 대해 오래전부터 고민 중이다. 실제로 실행에 옮기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리겠지만 이런 사업 계획을 잡는 건 일종의 취미생활 같은 거여서 즐거운 마음으로 구상을 하고 있다.
사실은 몇 가지 유력한 아이템이 있긴 하지만 여기서 상세히 오픈한다는 건 아무래도 성급한 행동이란 생각이 든다. ^^
아직은 실행 가능한 상상정도의 계획이지만 나름대로 몇 가지 원칙을 세워가고 있다. 동남아 거서 편하게 골프나 치면서 인생을 즐기려는 계획은 아니다. 여기서는 그다지 쓰일 데 없는 재능이더라도 거기서는 여러 사회에 유익이 될 만한 일들이 분명히 있다. 은퇴 후에 국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프랜차이즈 대리점이나 하면서 카운트를 지키기도, 배달을 다니기도 어정쩡한 꼰대로 시간을 죽일 수는 없지 않나. 그렇게 지낸다면 오년 내로 팍 늙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평균 수명이 백년이 되는 세상에서 남은 인생이 오십년은 된다고 본다면 지금까지의 기술이나 지혜들을 그냥 묵히기엔 너무 긴 인생이 남았다. 어떤 방향으로 갈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해서 나가고 싶다는 것이다.
3시 30분 비행기다. 점심을 먹고 가기엔 아직 배가 부르고, 여유 있게 가서 기다리는 것이 마음 편할 거 같아 일찍 움직였다. 공항은 코로나19 때문인지 생각보다 한산하다. 말도 안 되게 짧은 일정이지만, 점심시간에 엎드려 잔 단잠처럼 개운한 여정이다.
긴 여행도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날이 있다.
우리 인생 여정도 마칠 때가 있음을 기억한다.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소망 해 본다.